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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소(蘇) 문중 진주(晉州)
유래

퇴유당 소세양(蘇世讓)은 진주소씨가 자랑하는 대학자(大學者)소씨(蘇氏)는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단본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진주를 비롯하여 진강,충주,능주,익산, 조양등 12개의 본관이 전해지고 있으나,모두 진주소씨 분파세거지를 이르는 것으로 본다. 소씨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등한 수 천년의 세월을 만날 수 있으니,이땅에서 가장 시원(始原)이 깊고 유구한 성씨이다. 진주소씨세보(晉州蘇氏世譜)에 의하면 오방신장(五方申將)의 하나인 적제(赤帝)의 61세손 태하공(太夏公) 풍(豊)이 기성(己姓)을 소(蘇)로 바꾸어 소씨가 비롯되었는데, 태하공이 적제의 배곡(倍谷)에서 처음엔 난하로 옮겼다가 숙신(肅愼)의 홍제(洪帝)때 불함산으로 들어가 그곳에 봉해졌으며,그 나라 이름을 유소(有蘇)라 하였다. 뒤에 공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대륙으로 가고,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였는데,태하공의 69세손인 진공(辰公) 백손(伯孫)이 경주로 옮겨 후진한주(後辰翰主)가 되고 그 뒤 27대 동안 살았다. 신라 6촌의 하나인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蘇伐)이 바로 진공의 5세손이라 한다. 시조 소경(蘇慶)은 진공의 29세손으로 상대등(上大等신라때 화백회의를 주재하는 최고관직으로 531년(법흥왕18) 이찬(伊飡) 철부(哲夫)를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국사(國事)를 총리하게 한 것이 시초)이 되어 경신년 봄 3월 2일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옮겼고, 상대등 소경의 15세손인 소계령이 고려조에서 크게 현달하여 형부원외랑(6품),신호위상장군(上將軍:정3품), 이부상서(정3품장관)등을 지내고,그 딸이 헌종(獻宗)의 비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진산은 진주의 별호)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소씨가 진주를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진주소씨는 시조를 <경자보> 를 수간할 때까지는 문공공(文恭公) 소희철(蘇希哲)로 삼아왔으나, 1951년 발견된 양곡공(陽谷公) 후손 소창엽(蘇昌燁)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 <부소보(扶蘇譜)>와 1975년 발견된 소종만(蘇鐘萬) 소장인 <소치선가승(蘇致善家乘)>에 의해서 문헌사적과 분묘소재 등의 고증이 이루어져서 오늘날과 같이 상대등공 소경(蘇慶)을 시조로 바로잡게 되었음이 <신유보>에 나타나 있다. 상대등공의 묘영은 오래도록 실전되었던 것을 1975년 봄에 찾아 봉심(奉審)하게 되었다. 소경(蘇慶)은 577년 (진지왕 2)에 태어나 647년(진덕여왕 1) 2월에 상대등(上大等:신라 6대 귀족회의 의장)에 올랐다.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여러 군신들이 소경에게 섭정을 청하였는데, 이를 사양하며 "신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하고 실로 제세의 영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하고 김춘추(金春秋)를 추대하였다.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소경(蘇慶)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공의 조상 소벌을 문열왕(文烈王)에 봉하였다. <신유보>에 보면 소경은 소백손의 29세손이요, 또한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25세손으로 초명은 소알천(蘇閼川)이다. 나이가 팔순이 넘도록 손이 없었는데, 어느날 꿈에 선조인 백공(白公:소벌공蘇伐公)이 나타나 "그대가 도사곡으로 옮겨 살면 반드시 9치(9장군)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이 꿈을 꾼 후 무열왕 3년 3월 그곳 도사곡( 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으로 이사하여 결국 며느리 석씨(昔氏)가 손자 복서(福瑞)를 낳았다. 이에 그 기쁨으로 자신의 휘를 '경(慶)'이라 개휘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공의 3세 복서(福瑞), 4세 억자(億滋), 5세 후준(後俊), 6세 검백(劍白), 7세 상영(尙榮), 8세 목(穆), 9세 은(恩), 10세 송(淞), 11세 격달(格達)까지 9세 9장군(9世9將軍)이 이어져 현몽의 내용과 일치하는 9치자를 얻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뚜렷한 고증과 설화를 바탕으로 한 씨족의 기원과 흥기(興起)를 밝혀주고 있는 성씨는 흔치 않아 이는 우리 민족역사의 한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매우 소중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진주(晉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혜공왕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牧)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으며 995년(성종 14)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각 지방에 두어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병사.절도사)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1895년(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고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진주소씨는 조선시대에 소세양(蘇世讓, 1486년생)이 1509년(중종4)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 문과(文科대과)의 을과(乙科)에 급제하는 등문과(文科:문관을 뽑아쓰기 위한 과거.대과)에 12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됨)에 9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46명 등 6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소씨는 1985년에는 총 9,196가구에 38,872명이었고2000년에는 11,521가구에 37,184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