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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문화관광

함께 손잡고, 다시 뜨겁게! 멋을 아는 도시, 대전 중구

전설/유래

  • 은행동은 백제때 우술군에 속했다가 통일신라시대에는 비풍군에 속한지역 이었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에는 공주목에 속했다.

    이곳의 중심부는 천년을 더 살은 은행나무가 의연히 버티고 서있어 속칭 으능정이라 부르던 자연 부락인데 영조때에는 공주군 산내면 목척리라 하였다. 1885년에는 회덕군 산내면 목척리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정책에 따른 군·면이 통합되어 대전군 대전면 춘일정 리정목이 되었다가 1946년 해방후 왜식의 지명 일소책에 따라 옛지명을 되찾아 으능정이의 한자표기인 은행동 으로 개칭되었다. 이 은행동에서 예부터 중심을 이루었던 마을은 으능정이와 목척리 이다.

    으능정이 마을은 은행나무골이라고도 불리었는데 그 자리는 은행동 55-56번지 일대로 추측된다. 이 마을이 으능정이라 불리우게 된 것은 옛날 이곳에는 열아름이 넘는 큰 은행나무가 있어 그 은행나무 주위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 대전시민의 휴식처로 사랑 받고 있는 보문산은 다음과 같은 전설들에 의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첫째" 전설로는 우화형인데, 옛날 지금의 보문산 기슭에 아들 오형제를 둔 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장성한 아들들은 각각 자기 뜻대로 직업을 달리하여 분가를 하게 되자, 늙어 노인이 되도록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뭄이 들어 연못에 한 방울의 물이 없도록 마르자, 그곳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나와 농부 앞에 나타났습니다.

    농부는 두꺼비에게 물을 떠다 주었더니 두꺼비는 물을 마신 뒤에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해도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연못에 나가보니 작년의 그 두꺼비가 접시를 가지고 와서 농부 앞에 놓고 사라 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접시에 담뱃재를 떨었는데 다음에 보니 접시에 재가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조화라고 생각한 농부는 동전을 놓아 보았습니다. 이튿날 보니 동전이 또 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아들들이 다투어 접시에 탐을 내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의 욕심과 시기를 염려한 농부는 그 접시를 몰래 뒷산에다 묻고 돌아오다가 숨이 차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접시를 찾았으나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물이 묻혔다하여 보물산, 다시 변하여 보문산이라 하였습니다.

    "둘째" 전설은 효자형 전설인데, 옛날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착한 나무꾼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는 효성이 지극하여 그 소문이 이웃 마을까지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꾼에게는 술만 먹고 주정을 일삼는 형이 하나 있어 부모와 동생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어느날 나무꾼은 나무를 한짐 해가지고 내려오는 길에 조그마한 옹달샘 옆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때 샘 옆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무꾼은 재빨리 물고기를 샘물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물고기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듯 까불까불거리면서 사라졌습니다. 조금 후에 눈을 돌려보니 물고기가 놓여 있던 곳에 하나의 주머니가 놓여 있었습니다. 주머니를 집어보니 그곳에 ‘은혜를 갚는 주머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신기해서 나무꾼은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 동전 하나를 넣었더니, 순식간에 주머니에 동전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무꾼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형이 그 보물주머니를 빼앗을 욕심으로 동생에게 주머니를 한번만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착한 동생이 주머니를 형에게 보여주자 형은 주머니를 가지고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동생이 알아치리고 형을 쫓아 주머니를 도로 찾으려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화가난 형이 주머니를 발로 짓밟는 통에 그 주머니 안에 흙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주머니에 흙이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쏟아져 나와 쌓이고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쌓인 흙이 드디어 큰산을 이루니, 그 산 속에 보물주머니가 묻혀 있다 하여 보물산이라 하였고, 그후 보문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셋째"로는 도승형 전설이데, 옛날 한 대사가 소제동 방죽을 지나다가 해가 저물었는데 갑자기 논두렁에서 ‘우리 백성이 3년 가뭄으로 다 죽겠으니 우리 성을 살려주시오‘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니 용궁의 왕이었습니다. 이에 대사는 물고기를 모아 가뭄으로부터 구해줬습니다.

    그러자 용궁의 왕이 그 은혜로 복조리 하나를 대사에게 주었습니다. 대사는 복조리를 망태에다 간직하고 보문산 근처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날이 어두워 불빛이 나는 집을 찾아가니, 단칸방에 일곱 자식을 데리고 사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부인이 대사의 저녁으로 진수성찬을 차렸으나 아이들에게는 시래기죽을 주었습니다. 부인의 간청으로 저녁을 먹고 아랫목에서 하룻밤믈 잘 지낸 대사는 이튿날 부인에게 복조리를 건네주었습니다. 부인이 복조리에 쌀과 엽전을 넣었더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쌀과 돈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큰 부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복조리의 신통함을 알게 된 자식들이 그 복조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을 하였습니다. 부인은 복조리를 강변 모래에 묻었습니다. 그때 복조리에 모래가 들어가자 다시 모래가 쏟아져 나와 점점 늘어가 더니 큰 산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이 산은 보물산, 곧 보문산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 선화3동 법원 동쪽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면서, 이곳 어린이 놀이터에 있었던 바위 이름을 말합니다.

    바위의 모양이 마치 놋쇠로 만든 밥그릇인 바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위가 있는 연못에는 연꽃이 만발하였으며, 사람들은 이곳에서 칠월칠석날이나 정월대보름에 금줄을 두르고 마을의 평안을 빌기도 했다고 합니다. 광복 후 한국은행 지점장 사택을 짓기 위해 바위와 연못은 묻혀지고 말았습니다.

  • 중평 근처 버드내(오늘날 유등천)에 있던 돌다리를 말한다. 이 돌다리가 있었던 옛날에 마을의 어린이들이 여기서 물놀이를 즐겼었다. 이 돌다리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해 이른 봄 이 마을에 홍역이 크게 번져 한 아이가 죽게 되자 그 아이를 유등천에 버렸다고 합니다. 이후로 며칠 사이에 모든 어린이가 전멸되다시피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죽은 어린이를 이 돌다리에 버렸기 때문에 산신령이 노하여 많은 어린이가 죽게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돌다리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그 후부터 마을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 석교동 앞에는 대전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에 옛날에는 돌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합니다.

    "조선 광해군 때 판결사에 올랐던 남분붕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봉소루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틈틈이 낚시를 즐겼는데, 고기를 잡으면 먹지 않고 다시 물 속에 넣어 주곤 했습니다.

    하루는 색깔이 유난히 고운 큰 잉어를 잡았는데, 그 잉어를 물 속에 넣어주자 잉어는 주위를 맴돌다가 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는 낮에 잡았다가 놓아준 잉어가 나타나 하는 말이, "이 냇물엔 다리가 변변한 것이 없어서 여러 사람이 통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큰 바위가 있으니 그 바위로 다리를 놓으면 좋겠습니다." 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이튿날 남분붕이 잉어가 말한대로 그곳을 가보니 그곳에 길이 15자, 폭이 4자나 되는 꼭 다리의 형태를 지닌 큰 돌이 있었습니다. 그 돌로 내에 다리를 놓으니 보기가 좋고,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는데 안성마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다리를 "돌다리"라 불렀습니다.

    이 돌다리를 한자로 표기하여 석교(石橋)라 하였는데, 근처 마을의 이름 또한 이것에 연유하여 석교리(石橋里)라 하였고, 일제강점기에 대전군에 편입하여 석교정(石橋町)이라 하였습니다."

  • 옥계동의 옥계교에서 산쪽으로 있는 마을을 애바우 마을이라 하는데, 이는 이곳에 있는 바위가 아이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은 이름 이라 한다. 이 애바위에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한 아낙네가 이 근처를 지나다가 비를 만나게 되어 바위 아래에 잠시 비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비가 너무 억수같이 쏟아져 집에 가기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마침 그녀는 그때 임신한 처지였기 때문에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태기가 돌아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곧장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낳은 아이를 데리고 가려면 이불이나 옷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아이를 놔두고 멀리 보이는 집을 찾아가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크게 나더니,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요란하면서 바위에 큰 불덩이가 부딪치는 것입니다. 아낙네는 급히 바위로 돌아와 보니 아기는 없고 바위 위에 자기가 낳았던 아이를 닮은 바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위를 붙들고 통곡을 하였으나 다만 바위에서 애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 뒤에 비가 오는 날이면 이 바위에서 애 울음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애바위‘라 하였다고 합니다."

  • 지금의 산성초등학교 옆 동원아파트 뒤에 있는 바위인데 옛날에는 그 바위 밑으로 유등천이 흘러 물이 많았으니, 이곳 동네 사람들이 그 바위에서 미역을 땄다하여 미역바위라 이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바위에 얽힌 다음과 같은 같은 전설도 전합니다.

    옛날 이곳 마을 산기슭에 사냥꾼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다. 다만 슬하에 아이가 없음을 늘 탄식하였습니다. 어느 날 사냥꾼이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오는데, 새끼들이 주렁주렁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집까지 따라와 귀찮게 하자 그는 새끼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그날밤 아내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새끼들을 죽였으니 천벌을 면치 못하리라 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아내는 자신에게 자식이 없음은 바로 남편이 사냥질을 하면서 짐승의 새끼까지 죽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남편에게 사냥질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남편은 사냥을 그만두고 농사일에만 전념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밤 남편의 꿈에 ‘그대의 정성을 보아 아들을 갖게 하리라.‘하는 산신령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태기가 있고, 열달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시 산신령이 꿈속에 나타나 ‘집 아래쪽 검은 바위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미역을 따다가 산모에게 먹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검은 바위에서 미역을 따다가 부인에게 끓여 주었습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도 아이를 낳으면 이 검은 바위에서 미역을 따다 산모에게 끓여 주었으니, 그때부터 이 바위를 미역바위라 하였다 합니다. 그 후로 이 바위에 관련한 민요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미역바위에서 미역 따다가 장텃골에서 장 얻어다가 뗏집거리에서 떼 떠다가 복수에 가서 보글보글 끓여 먹는다.

  • 한밭도서관의 서남쪽에 있는 자연부락 이름으로 천근(天根)이란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산 중턱에 벙어리샘이라 하는 샘이 있습니다. 천근이란 이름은 주역의 복희 팔괘를 두고 읊은 송나라 소강절(邵康節)의 시(詩)에 나오는 천근월굴(天根月窟)에서 따온 것입니다. 서구 월평동의 옛 이름은 월굴(月窟)이라 하고, 이곳 이름을 천근(天根)이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천근은 명당이기에 옛부터 이곳에는 부자가 많이 살고 대(代)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이 부(富)를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아무리 흉년이 들고, 풀뿌리조차 죽어가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니, 그 샘이 곧 벙어리샘입니다. 이 샘에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샘에 와서 백일동안 기도를 하면 소원이 풀린다 하여 샘물로 목욕을 하고 백일동안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천근마을에 말 못하는 벙어리가 살았는데, 그는 마음씨가 착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잠시 쉬기 위해 누웠다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때 꿈에 한 선녀가 나타나 저 샘에 가서 목욕을 하고 백일동안 정성드려 기도하면 말을 할 수 있다고 계시하였습니다. 그 뒤부터 벙어리는 샘에 와서 목욕을 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백일이 되던 날 샘을 찾아와 눈을 감고 합장을 하며 정성껏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가 인기척이 들려와 눈을 뜨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눈을 뜨자 꿈속에 나타났던 선녀가 그 앞에 서서 웃고 있지 않는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선녀님‘하고 외치자 선녀는 빙그레 웃고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말을 하게 되었고, 그가 백일동안 정성드려 기도했던 이 샘을 벙어리 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 이 샘은 ‘불탄골‘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전설이 전합니다.

    "옛날 안영동 골짜기에 나무숲이 울창하고 큰 기와집이 여러 채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자그마한 절간이 있어 중이 20명쯤 살고 있어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절간에 불이 나서 손쓸 도리가 없이 마구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한 마리의 용이 나타나 연기를 타고 불타는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길은 더욱 치솟아 그 절이며, 용이며 모두 타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 자리를 '불탄 골'이라 했고, 그 용이 내려왔다는 골에는 조그마한 옹달샘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 대전에서 침산동으로 가는 언고개에 옥녀바위가 있는데, 옥녀바위에 못미치는 곳에 있는 바위가 곧 아들바우입니다.

    아들바우에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데 돌을 던져 들어가면 아들을 나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