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손잡고, 다시 뜨겁게! 멋을 아는 도시, 대전 중구
세상에 무한한 것 어디 있으리,
창건당시부터 폐사되기까지 수도자들의 염불과 독경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사지는 적막함만 감돌뿐이다. 사지에 무성히 자란 잡초는 불전의 주초석을 삼켜버렸고 무너진 축대의 흔적 또한 적나라하지 않게 가려 돌무더기로 보일 만큼 만 폐사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보문사지는 옛 영화의 흔적마저 무심히 녹이고 있다.
보문사지 표석과 석조. 직사각형의 석조는 계곡이 흐르는 중심에 놓여있어 계곡물을 받아내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인 ‘도산서원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문사가 이 지역의 중요한 사찰의 하나였던 사실을 짐작하기만 할 뿐 더 이상 유래를 확인 할 수 없는 절터. 보문사지가 알려지기 전 이 곳은 근동 농부의 밭이었다. 깊은 산중이지만 볕이 잘 들어 농사가 잘됐던 이곳은 그만의 보물창고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농부는 어느 때인가부터 사지를 찾지 않았다. 절을 떠나간 수도승들처럼 홀연히 찾아와 사지를 벗했던 농부의 금당터 구유만 남아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에 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다.
사지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한 쪽만 남은 괘불지주다.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괘불을 걸 수 있는 지주는 금당 앞에 세워지게 마련이어서 그 용도에 미루어 지주 뒤로 단을 쌓고 터를 닦은 곳은 금당터로 지목되지 않을 수 없다.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에 오르면 마치 기둥을 세우려 덤벙주초를 가져다 놓은 듯 돌의 크기와 생김새, 놓임새가 기둥만 세우면 당장이라도 대웅전이 들어설 듯 그 흔적이 역력하다.
금당 터 앞에 남아있는 괘불지주. 표면을 거칠게 다듬은 점이 특이하다.
금당터 주변에 나뒹구는 깨진 와편은 날카로운 구석 없이 두루뭉실하게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에 무한한 것이 없음을 애써 일깨우지 않더라도 사지에서는 안타까울 게 없다. 깨진 맷돌, 한쪽을 잃은 괘불지주, 계곡의 막돌과 섞여 뒹구는 석조 개수대 등을 보는 마음과 눈이 담담할 수 있는 것은 보문사지가 옛 영화를 녹여 내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지에 나뒹구는 깨어진 맷돌 조각과 쓸모 모를 석조물의 파편.
보문사터는 보문산 정상에서 배나무골로 넘어가는 능선에 있다. 절터의 범위는 동서 약 70m, 남북 약 50m 정도로 남쪽을 향한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3단을 이루고 있다.
아랫단에는 길이 10여m, 높이 1m에 달하는 축대가 쌓여 있으며, 앞면 6칸·옆면 2칸의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두번째 단에는 2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파괴가 심하여 건물의 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제일 윗단 앞에는 축대 바로 밑에 괘불 지주 한 쌍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일 윗단이 대웅전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절터에서 발굴되는 기와 조각과 도자기 조각은 주로 조선시대의 유물들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인 『도산서원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문사가 이 지역의 중요한 사찰의 하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보문사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사찰내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곳이다. 보문사는 확실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지만, 대전시 탄방동에 자리하고 있는 도산서원의『연혁지』에 이 절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서원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법맥을 잇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터에는 건물자리 5개와 석조·괘불지주·맷돌·세탁대 등이 남아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조는 전체가 4각을 이루고 밑바닥과 각 면은 평평하게 다듬어졌다. 바닥아래와 윗부분에는 고인 물을 다른 곳으로 빼기 위한 구멍이 있는데, 특히 윗부분의 구멍이 주전자 꼭지모양으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 내렸을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추측된다.